[예술과 오늘]‘케데헌’과 매기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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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연출한 매기 강 감독은 한국계 캐나다인, 쉽게 말해 교포다. 어린 시절 이민을 떠난 그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고 그걸 늘 자긍심으로 여겼다. 어찌 보면 그는 어렸을 때 경험한 한국에 대한 기억, 전통, 그리고 그가 좋아해온 음악들에 대한 헌사로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케데헌>에는 미국 메이저 스튜디오에 제안하기에는 힘들었을 법한 세세하고 소소한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묘사와 인용이 들어갔다. 강 감독은 그것들을 굳이 미국화하려 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의 말은 울림이 크다. 사실 지난 세월 한국 대중문화의 세계 진출은 어떤 열등감과 두려움으로 점철됐다. 고춧가루랑 마늘을 빼고, 그 자리에 치즈와 버터를 넣어도 봤다. 우리 문화에 외국인들이 싫어할 만한 요소는 없는지, 그들에게 익숙한 어떤 현지 문화로 대체할 수 있을지 고민했고, 가급적 한국이라는 요소를 배제하고 스스로를 ‘무국적’화했다. 수치로 입증할 수야 없겠지만 K팝을 비롯한 한국 대중문화의 글로벌한 성공에는 그런 전략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는 고유성이나 진정성보다는 보편성과 가변성을 우선시했고 그 둘이 영영 다른 것이라 느꼈다.
매기 강 감독이 ‘토종’ 한국인들은 만들지 못한 철저히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작품을 만든 것은, 바뀐 시대의 덕도 있겠지만, 그가 이민자로서 끊임없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교섭하고 고민해온 결과라 할 수 있다. 우리끼리만 있을 때는 당연한 것들이 밖에서는 새삼스럽게 느껴지고, 중요하게 여겨지며, 나를 표현하고 싸워나가는 중요한 무기가 된다. 교포들은 오랜 시간 ‘한국’의 의미를 단순한 국적이자 ‘국뽕’이 아닌 생존과 투쟁의 영역에서 고민해온 사람들이다. 그 어떤 독특한 정체성의 고유함이 새로운 시대에 이 같은 작품을 가능케 한 것만은 분명하다.
소니가 만든 넷플릭스 작품을 K콘텐츠로 볼 수 있느냐의 논쟁은 한국 문화를 수출품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옛 시절의 생각들을 떠올리게 한다. ‘한류’는 단순히 우리 문화를 세계시장에 파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를 공유할 때 완성되는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세계화이자 보편화다. <케데헌>은 교포 매기 강이어서 만들 수 있었던 K콘텐츠이고, 한국 내에서는 봉준호와 한강처럼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는 이야기가 또 있다. 나아가 한국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외국인들이 만들고 재해석할 수 있는 한국 문화의 영역이 또 있을 것이다. 당연히 K콘텐츠의 정의는 달라지고 그 지경은 넓어질 것이다. 어디까지가 우리 것인가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이 국면에서 우리가 안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더 많이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매기 강 감독은 <케데헌>의 속편에 대한 계획을 묻자 ‘트로트’를 언급했다. 필자는 유학 중 세계의 민속음악들을 연구하면서 트로트의 음악과 정서가 매우 고유하면서도 보편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벌써 기대가 된다. 밖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영영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의 한가운데, 시민들이 그늘막 아래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린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없던 풍경이다. 서울 서초구가 기후변화에 따른 폭염도 재난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 그늘막 설치를 추진했고, 1년여 준비 끝에 2015년 6월 첫선을 보였다. 이제 전국 어디서나 익숙해진 이 시설물은 공공디자인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
그늘막뿐만이 아니다. 버스 정류소와 벤치, 가로 화분대, 맨홀과 소화전, 안내표지판과 현수막 게시대, 고속도로 색깔 유도선까지 우리가 무심코 스쳐 지나가며 ‘세상 참 좋아졌다’고 느끼는 요소요소에 공공디자인이 적용돼 있다.
‘공공디자인의 진흥에 관한 법률’, 속칭 공공디자인법이 2016년 8월부터 시행 중이다. 공공(public)과 디자인(design)의 합성어인 ‘공공디자인’은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지만 실무자들조차 ‘디자인’이라는 말에 갇혀 공공시설물을 보기 좋게 꾸미는 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공공디자인은 시민이 더 안전하게 길을 오가고, 편히 쉬기도 하고, 이런저런 불편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공공 공간을 개선하는 방법을 찾아 실행하는 일이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의 의뢰로 공공디자인 실무자들의 이해를 돕는 선도 사례를 취재하고, 그 내용을 사례집 <공공디자인 합니다>에 정리했다. 이 사례집은 결과물보다 시행착오를 포함한 과정을 기록해 공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현장에서 확인한 사실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공공디자인은 시설물을 예쁘게 바꾸는 일이 아니라 삶의 질을 개선하는 적극적인 시도로써 사회 곳곳의 ‘관계성’을 촘촘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점이다. 둘째, 정책이 정상 궤도에 오르기까지는 과감한 모험과 실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초구의 그늘막도 그랬다. 시범 설치 후 시민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지만 도로교통법상 교통섬이나 모퉁이에 설치된 시설물이 시야를 가려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기존 법령과 새로운 재난 대응 사이에 충돌이 생긴 것. 이에 서초구는 기능적으로 가로수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적극 설명하며 꾸준히 디자인과 안전성을 개선해 나갔다. 결국 행정안전부는 2019년 서초구의 그늘막을 기준으로 ‘폭염 대비 그늘막 설치 지침’을 마련했고, 이후 전국으로 확대됐다. 법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삶의 질을 높이려는 시도가 제도 변화를 이끌어낸 사례다.
서울 동작구의 범죄 예방 디자인, 일명 ‘셉테드(CPTED)’ 역시 공공디자인 논의에서 빠지지 않는다. 사각지대를 주민 휴게공간으로 조성해 자연감시 기능을 강화하는 등 지역 곳곳의 범죄에 취약한 틈새공간을 정비한 사업으로, 처음에는 구의회에서도 범죄 예방을 경찰 업무로만 보는 인식이 있을 만큼 낯선 사업이었다.
동작구는 전담팀을 신설하고, 조례를 제정해 행정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성격에 맞는 공모 사업을 부지런히 찾아 예산을 조금씩 확보해나갔다. 또한 범죄 예방은 일시적인 사업으로는 지속될 수 없기에 초기부터 주민 참여형으로 설계했다. 당연해 보이지만, 공무원에게는 큰 부담거리다. 또 다른 민원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세심하게 설계된 동작구의 범죄 예방 디자인은 시각적으로 그리 도드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인상적이다. 디자인이라고 하면 화려하고 새로운 것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관계자는 목적에 맞게 덜어내고 정제하는 것 또한 디자인이라며 공공디자인이 추구해야 할 방향성을 꼬집었다.
공직사회 특유의 순환보직과 그에 따른 소극 행정 탓에 선도 사례를 답습하거나 보여주기식으로 진행되는 공공디자인 사업이 적지 않다. 앞서 언급한 두 사례 외에도 지역민의 삶이 더 나아지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고, 세심히 관찰하며, 때로는 과감히 모험을 감행하는 이들을 만나 반가웠다. 앞으로도 애꿎은 보도블록을 뒤엎거나 정체불명의 조형물이 지역을 어지럽히는 대신 지역민의 삶을 개선하고 관계를 촘촘히 잇는 용기 있는 시도가 우리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과정이자 문화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올해로 20회를 맞이한 ‘경향금융교육대상’이 공모를 시작합니다. 경향신문과 금융감독원, 신용회복위원회가 주최하고 금융위원회가 후원하는 이 상은 지난 20년 동안 금융과 신용교육의 저변을 넓혀왔습니다. 건전한 금융문화 정착을 위해 금융 및 신용 교육 활동을 펼쳐온 단체와 개인, 금융교육에 참여한 학생이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습니다. 특히 중·고·대학생은 경제·금융 관련 도서 독후감과 소논문 등 다양한 형식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신용사회 지속을 위한 이번 공모에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신청자격
시상 내역
응모방법 : 우편 또는 e메일 접수
제출서류- 경향금융교육대상 응모신청서 양식 및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 참조- 금융교육 활동자료(문서파일, 사진, 교육용 도구 등)※학생은 체험수기, 동아리 활동 사항, 독후감·소논문·리포트(분량 제한 없음), 경제워크북 등에서 선택해 제출
접수마감 : 2025년 10월31일
접수처- 우편)04518 서울 중구 정동길 3 경향신문사 7층 문화사업국 ‘경향금융교육대상’ 담당자- e메일) info@khan.kr
발표 및 시상 : 2025년 12월
문의 : 경향신문 경향금융교육대상 담당자(02-3701-1601~2)
후원
“임신중지는 범죄로 다뤄져선 안 됩니다. 이것은 의료서비스입니다.”
온라인으로 임신중지약 정보 등을 제공하는 국제단체 ‘위민온웹(Women on web)’의 의사 수잔 펠트하이스 박사가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말했다. 여성인권을 상징하는 초록색 옷을 입은 그는 “임신중지약은 여성의 안전을 위한 필수적 권리”라고 했다.
이날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에서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등이 주최한 ‘모든 사람들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한 유산유도제 도입 간담회’가 열렸다. 유산유도제는 임신중지를 위해 먹는 약으로, 한국에선 ‘미프진’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지난달 13일 이재명 정부가 ‘임신중지 약물 도입’과 ‘임신중지 법·제도 추진’을 국정과제로 명시하면서 관련 입법을 통해 이 약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19년 형법상 낙태죄 조항이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 이후로 여성단체 등은 미프진을 정식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관련 법이 정비되지 않았다”며 허가를 미뤄왔다. 국회에서도 입법이 되지 않으면서 6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프진 도입 등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국가 차원의 의료 정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SNS에선 ‘미프진 구합니다’와 같은 게시글이 꾸준히 올라오는 등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다.
이날 간담회에 초청된 펠트하이스 박사는 임신중지약 도입을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한 해 7333만 건의 임신중지가 이뤄지고 있고 이 중 2500만건의 임신중지가 안전하지 않은 방법”이라며 “임신중지약은 여성이 불법 수술 등에 의존하지 않고 안전하게 임신중지에 접근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간담회 자료를 보면 임신중지약을 먹었을 때 과다 출혈 등 심각한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은 0.5% 이하라고 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05년 미프진과 같은 임신중지약을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했다. 현재 미국·프랑스 등 90여개국에서 임신중지약을 약국 등에서 구매할 수 있다. 한국에선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가 보건복지부 장관과 식약처장에게 도입을 권고했다.
펠트하이스 박사는 임신중지를 범죄화하는 사회에선 불평등이 심화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는 “임신중지가 필요한 사람들은 주로 사회적 취약계층”이라며 “가정폭력·성폭력 피해자, 청소년, 실업자 등 임신중지에 대한 정보나 교육·비용이 부족해 치료에 접근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제도가 없으면 이들은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지로 내몰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임신중지를 범죄로 바라봐선 안 된다”고 했다.
간담회에 참여한 윤정원 국립중앙의료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이주 여성, 장애 여성 등 제도권 바깥에 있는 한국 여성들에게 임신중지 서비스는 사치제가 됐다”며 “의정 갈등으로 인한 전공의 사직으로 산부인과 진료도 부족한 상황에서 여성들 간에 어떤 격차가 생기는지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정책연구원의 2025년 이슈페이퍼를 보면 임신중지 수술 비용 등은 ‘100만원 이상’이 40%로 해마다 느는 추세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1일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법안엔 ‘인공임신중절’을 ‘인공임신중지’라는 용어로 바꾸고, 수술에 더해 약물을 사용하는 행위도 임신중지 의료행위에 포함했다. 펠트하이스 박사는 “이런 필수적인 의료서비스는 굉장히 중요하다”며 “임신중지는 특권이 아닌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죽은 건 안타깝지만 이건 아니지. 세금으로 왜 보상해줘? 나라를 위해 순직한 것도 아니고 서양 귀신 축제에 술 퍼마시고 놀다가 죽은 건데…” 2022년 이태원 참사가 일어나자, 포털 뉴스에는 이처럼 희생자를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댓글이 넘쳤다. 작년 제주항공 2216편 사고 때도 “유가족들만 횡재네요. 보상금 받을 생각에 속으로는 싱글벙글일 듯”이라는 악성 게시물이 어느 인터넷 동아리에 게시되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참사 피해자에 대한 모욕을 근절할 전담 수사팀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유감스럽게도,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재난을 당한 피해자를 종종 비난한다. 피해자가 부주의했다거나, 앞뒤를 잘 헤아리지 못했다거나, 가해자의 폭행을 은근히 부추겼다는 등의 이유를 들면서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라고 비웃는다.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이 대유행했을 때 에이즈에 걸린 환자, 특히 동성애 환자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의 분별없는 언행이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자초했다고 믿는 유럽인이 아직도 많다.
왜 우리는 변고를 당한 피해자를 향해 비난을 퍼부을까? 위로해주기 싫으면 그냥 예의 바르게 가던 길을 가면 되지 않나? 진화심리학자 파스칼 보이어는 소규모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끼리 서로 협력하게끔 진화한 인간 본성에 그 해답이 있다고 본다. 먼 과거의 수렵·채집 환경에서 느닷없이 질병이나 사건·사고로 인해 크게 다치거나 앓아눕는 일은 흔하디흔했다. 병원도, 보험도, 사회안전망도 없던 시절이다. 오직 피해자가 기댈 구석은 다 나을 때까지 혈연, 친구, 동료 같은 주변 이웃이 자신을 먹여주고 지켜주고 배려해주는 것뿐이었다.
피해자에게 닥친 재난은 주변 이웃에게 딜레마를 안긴다. 먼저, 이웃 자신이 누구를 파트너로 골라야 할지 생각해 보자. 이웃의 관점에서, 큰 고초를 겪어 피폐해진 피해자는 앞으로 상호 협력의 과실을 함께 나눌 듬직한 파트너가 되기 어렵다. 오늘 그를 성심껏 돕더라도, 내일 그가 말끔히 회복되어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자기 몫을 다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웃 자신이 어떻게 자기 평판을 관리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 이웃의 관점에서, 만신창이가 된 피해자를 선뜻 도와주는 모습을 남들 눈앞에서 연출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아무개는 따뜻하고 인정 많은 사람이야!”라는 좋은 평판을 유지해 나중에 남들로부터 상호 협력의 파트너로 선택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주변 이웃은 피해자를 도우면 안 된다. 내가 그를 돕느라 치른 비용이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르게 보면, 주변 이웃은 피해자를 도와야 한다. 도와주길 거절하면 그동안 내가 쌓아 올린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변고를 당한 피해자의 이웃은 어떻게 이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한 가지 해결책은 피해자가 조심성 없고 부주의해서 재난을 어느 정도 자초한 책임이 있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피해자를 구제하려는 공동체의 노력에 동참하지 않으면서도, ‘관대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떨어지는 사태는 떳떳이 피할 수 있다. 한마디로, 피해자 비난은 피해자가 도움받을 자격이 없음을 다른 구성원들에게 널리 알림으로써 내가 피해자를 돕는 짐을 지지 않으려는 방편이다. 노파심에 덧붙이자. 과학은 피해자 비난이라는 범죄가 왜 일어나는지 설명할 뿐이다. 결코 그 범죄가 정당하다는 면죄부를 발행하지 않는다.
보이어의 가설에 따르면, 사람들이 재난을 당한 피해자의 성품을 깎아내리는 정도는 피해자가 장차 자신과 협력할 파트너가 될 수 있을지 사람들 각자가 평가하는 바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학술지 ‘인간 본성’에 게재한 연구에서 보이어는 운전 중 휴대전화로 통화하다 사고를 내서 차를 폐차하게 된 어느 서민의 이야기를 실험 참여자들에게 제시했다. 예측대로, 피해자의 성품을 낮게 매긴 참여자일수록 참여자 자신이 나중에 피해자와 함께 협력할 의향이 더 낮았다. 특히 이웃에게 새 차를 사달라고 요청한 피해자는 그간 모아둔 저축으로 새 차를 산 피해자보다 성품이 더 나쁘게 매겨졌다.
피해자 비난은 먼 과거의 소규모 공동체에서 협력에 내재한 딜레마에서 나온다는 가설을 살펴보았다. 이 가설이 맞다면, 특히 이태원, 세월호 사건 등 사회적 대참사의 희생자에 대한 조롱과 비난은 현대 사회의 거대한 복지와 먼 과거의 소소한 도움이 똑같다고 여기는 인간 마음의 진화적 한계에서 기인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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