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나우 강에서 수영해 봤어? 빈을 색다르게 즐기는 여름 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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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음악과 오페라, 황금빛 궁전으로 상징되는 빈은 흔히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도시로 기억된다. 하지만 여름이 찾아오면 빈은 오래된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표정을 드러낸다. 도나우강은 시민들이 더위를 식히는 휴식 공간이 되고, 황실 마구간은 맥주와 공연이 어우러지는 활기찬 광장으로 변신한다. 포도밭에서는 와인잔이 부딪치고, 클래식 선율은 공연장을 넘어 공원 잔디밭까지 흐른다. 단언컨대 여름의 빈은 현재를 살아내는 도시다. 관광명소보다 시민들의 일상을 따라 걸을 때 그 진짜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셔츠 안 수영복’의 계절
지하철 U1 노선 알테도나우역에 내리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깨에는 비치타월을 걸쳤고, 한 손에는 물안경을 들었다. 수영복 차림으로 전철에서 내리는 사람도 낯설지 않았다. 5분쯤 걸었을까. 잔잔한 알테 도나우(올드 도나우)가 눈앞에 펼쳐졌다.
독일에서 발원해 10개국을 거쳐 흑해로 향하는 도나우강은 빈에 이르러 여러 갈래로 나뉜다. 본류는 도심을 가로지르고, 홍수 방지를 위해 만든 인공 수로 ‘노이에 도나우(뉴 도나우)’가 나란히 흐른다. 두 물길 사이에는 길이 21㎞의 도나우섬이 펼쳐지고, 옛 도나우 본류의 일부는 정비를 거쳐 ‘알테 도나우’라는 호수 형태의 수역으로 남았다. 홍수를 막기 위해 조성된 공간은 오늘날 수영과 보트,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의 대표적인 휴식처가 됐다.
전기 보트를 타고 천천히 수면을 가르자 빈의 일상이 펼쳐졌다. 아이들은 강을 수영장처럼 누볐고, 패들보드를 탄 청년들은 물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백조가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도 이곳에서는 자연스러웠다. 강변 잔디밭에도 각자의 여름이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 낮잠을 청하는 사람, 와인을 나누는 친구들,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는 가족이 명화처럼 어우러졌다.
도나우섬의 강변 비치인 피어22는 조금 더 활기찬 여름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음악이 흐르고, 선베드에 누운 젊은이들은 햇살을 즐겼다. 물에서 올라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강으로 뛰어드는 풍경은 빈의 여름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줬다.
이런 풍경은 현지인만 누리는 일상이 아니다. 알테도나우와 도나우섬 곳곳에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자연 수영장이 마련돼 있고, 덱(deck)과 잔디광장, 샤워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피어22와 코파비치처럼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곳도 많다. 수영복과 수건만 챙기면 여행자도 시민들 틈에 섞여 강에서 보내는 한여름 오후를 경험할 수 있다.
황실 마구간, 힙한 광장으로
빈에서 가장 트렌디한 문화 공간을 꼽으라면 뮤지엄콰르티어(MQ)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실 마구간을 리모델링해 만든 이곳은 현재 50개가 넘는 박물관과 갤러리, 공연장, 디자인 숍, 카페가 모인 문화예술 복합단지로 운영 중이다.
첫 방문이라면 레오폴트 미술관과 현대미술관 무목부터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에곤 실레와 구스타프 클림트를 좋아한다면 레오폴트 미술관을, 현대미술에 관심 있다면 앤디 워홀과 오노 요코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무목이 좋은 선택이다.
그러나 모든 박물관을 다 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예술은 전시실 안에서 끝나지 않고, 광장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뿐 아니라 노트북을 들고나온 대학생, 약속을 기다리는 직장인, 공연을 즐기려는 여행객들이 하루 종일 광장을 채운다. 젊은 세대가 자연스럽게 모이는 도심 속 문화 놀이터에 가깝다.
MQ의 상징이 된 ‘엔치’는 매년 새로운 색으로 제작되는 야외 라운지 의자다. 누구나 자유롭게 앉아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고, 쉬어갈 수 있다. 올해는 개관 25주년을 맞아 오스트리아 전통 디저트에서 영감을 얻은 분홍색과 레모네이드를 닮은 노란색 엔치가 광장을 채웠다.
무료 프로그램도 빼놓을 수 없다. 5월 말부터 9월까지 메인 광장에서는 공연과 영화, 문학, 토크 콘서트로 구성된 ‘MQ 서머 스테이지’가 열린다. 또한 옥상 전망 공간 ‘MQ 리벨레’에서는 늦은 해를 머금은 슈테판 대성당과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로컬 여행을 원한다면 2구역으로
성 슈테판 대성당과 호프부르크 왕궁이 자리한 1구역이 제국의 영광을 기억하는 곳이라면, 도나우 운하 건너 2구역 레오폴트슈타트는 로컬의 빈을 가장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동네다. 세탁소와 빵집, 자전거 수리점이 골목을 채우고 카페 테라스에는 산책을 즐기는 주민들이 자리한다. 운하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도시의 속도도 한결 느긋해진다.
동네의 중심에는 카르멜리트 시장이 있다. 화려하거나 규모가 큰 시장은 아니지만 대신 여행자가 빈의 일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아침이면 채소와 과일을 고르는 주민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해지고, 빵 굽는 냄새와 갓 내린 커피 향이 골목을 채운다. 주말이면 직거래 장터가 열려 시장은 더욱 활기를 띤다.
이 시장의 풍경은 이 동네를 지켜온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한때 이곳은 빈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지였다. 17세기부터 유대인들이 모여 살며 상점과 시장을 일궜고,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은 뒤에도 그 흔적은 거리 곳곳에 남아 있다. 지금도 코셔 베이커리와 식료품점, 학교와 회당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검은 모자와 긴 코트를 입은 정통파 유대인들을 마주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최근에는 역사 위에 젊은 감각이 더해지고 있다. 오래된 건물 1층에는 독립 서점과 디자인 숍, 개성 있는 카페와 베이커리가 하나둘 문을 열었다. 여유가 있다면 골목을 천천히 걸어보자. 특별한 목적지가 없어도 발걸음이 자꾸 느려지는 동네다. 빈 사람들이 왜 이곳을 사랑하는지 금세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도시 안에서 만난 포도밭, 부셴샹크
많은 사람이 빈을 음악과 커피의 도시로 기억하지만, 이곳은 수도 안에서 상업용 와인이 생산되는 몇 안 되는 도시 가운데 하나다. 약 600㏊의 포도밭이 시내를 둘러싸고, 수십 개 와이너리가 지금도 와인을 빚는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에게 포도밭을 찾아 와인 한잔을 마시는 일은 특별한 여행이 아니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일상이다.
‘부셴샹크’는 빈의 와인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와이너리가 직접 운영하는 전통 와인 선술집으로, 그해 수확한 와인과 간단한 지역 음식을 함께 낸다. 18세기 요제프 2세가 와인 생산자의 직판을 허용하면서 시작된 문화로, 지금도 치즈와 햄, 스프레드, 빵 같은 소박한 안주와 함께 와인 자체의 맛을 즐기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여행자도 어렵지 않게 이 풍경에 동참할 수 있다. 트램 D를 타고 종점 누스도르프에서 내려 ‘시티 하이킹 트레일 1’을 따라 2㎞ 남짓 걸으면 포도밭이 이어진다. 완만한 언덕길을 따라 걷는 동안 도시 전경과 도나우강이 시원하게 펼쳐져 발걸음이 가볍다.
길 끝에서 만난 ‘비닝어 암 누스베르크’는 빈을 대표하는 부셴샹크 가운데 하나다. 이곳의 별미는 빈을 대표하는 와인 게미슈터사츠다. 여러 품종의 포도를 한 포도밭에서 함께 재배해 같은 날 수확하고 함께 양조하는 빈만의 와인이다. 흉작을 줄이기 위한 농부들의 지혜에서 시작됐지만, 오늘날에는 빈 와인을 상징하는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와인잔을 오래 들고 있어도 누구 하나 시간을 재촉하지 않는다. 잔이 비면 일행이 말없이 와인을 따라주고, 아이들은 포도밭 사이를 뛰어다니며, 반려견은 테이블 아래 느긋하게 몸을 뉜다. 궁전과 미술관을 둘러보던 하루는 그렇게 포도밭 너머로 천천히 저물어간다.
클래식, 공연장 밖으로 나오다
여름의 빈은 해가 좀처럼 지지 않는다. 밤 9시를 훌쩍 넘겨도 하늘에는 푸른빛이 남아 있다. 이 계절의 저녁을 가장 아름답게 펼쳐내는 곳은 프라터다. 1766년 황실 사냥터가 시민에게 개방되면서 탄생한 이곳은 250년 넘게 주민들의 쉼터였다. 드넓은 잔디와 숲길, 놀이공원이 어우러져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로 늦은 저녁까지 활기가 이어진다.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매년 여는 ‘프라터 피크닉 콘서트’는 이런 공원의 성격을 그대로 닮았다. 수만 명이 찾는 무료 공연이지만 ‘관객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긴장감은 없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도 되고, 아이와 함께 와도 되고, 강아지를 데려와도 된다. 올해는 한국계 미국인 지휘자 최현이 지휘를 맡았다.
첫 음이 울리자 공원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뛰놀던 아이들은 부모 곁으로 돌아왔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시선은 자연스럽게 무대를 향했다. 누군가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연주를 들었고, 누군가는 잔디에 누운 채 귀를 기울였다. 음악에 맞춰 두 손을 맞잡고 천천히 춤을 추는 사람들도 보였다. 풀 향기를 머금은 바람, 늦은 저녁의 공기, 아이들의 숨소리까지 음악의 일부가 되는 순간이었다.
공연이 끝나도 사람들은 서둘러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바로 옆 놀이공원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고, 1897년 세워진 비너 리젠라트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클래식이 흐르던 공원은 어느새 웃음과 설렘으로 가득 찬 여름밤으로 이어졌다.
여행은 도시를 얼마나 많이 보는지가 아니라, 그 도시가 살아가는 속도를 함께 걸어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빈의 여름은 이를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시간이다.
자신의 유튜브 채널 영상에서 “재선거”를 외치는 악성 민원인을 풍자했다가 논란에 휩싸였던 코미디언 이수지가 1일 사과의 글을 올렸다.
이수지는 유튜브 채널 ‘핫이슈지’에 자필 글을 올리고 “불편함과 실망을 느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고개숙여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수지는 “마음 상하셨을 분들께 빠르게 대처하고 사과드리지 못한 점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제 불찰이며 책임”이라며 “웃음을 만들겠다는 의도와 별개로,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 상처와 불편함을 드렸다는 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늦었지만 제 진심을 직접 전하고 싶어 이 글을 남긴다”며 “웃음을 드려야하는 희극인으로서 저는 더 신중했어야 했다. 제 연기와 콘텐츠가 누군가에게는 상처나 불쾌감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고 했다.
이수지는 “이번 일을 계기로 저 자신을 더욱 깊이 돌아보겠다”며 “많은 분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건강한 웃음을 전하는 희극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수지는 지난달 14일 공개한 영상 <진짜 극한직업> 공무원 편에서 악성 민원인을 상대하는 공무원을 연기했다. 영상 속 악성 민원인 중에는 “재선거”를 연달아 외쳤고, 이수지는 “여기서 이러시면 안된다”고 반응했다. 그러나 재선거 요구가 악성 민원인과 동일 선상에 놓였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핫이슈지 제작진은 지난달 15일 사과 입장을 밝혔고, 영상을 삭제했다. 이수지가 유튜브 채널에 직접 사과문을 올린 것은 18일 만이다.
‘주말의 취향’은 지면에 다 담기 어려운 문화 현장의 소식들을 풀어서 전합니다. 마음은 가볍게, 생각은 깊이 할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서울박스’ 한가운데 검은 파도가 솟아 있습니다. 높이 8m가 넘는 화면이 한껏 치솟았다가 끝부분이 관람객 쪽으로 쏟아져 내리듯 휘어집니다. 매끈한 검은 화면 위로 우주에 떠 있는 듯한 바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주위로 낙서처럼 보이는 선과 글자들이 몰려듭니다.
HAVE, MANY, DUMB, FIGHTS, AGAINST, ROCK.
여섯 단어와 고전 만화에서 본 듯한 ‘모션 라인’이 달려들어 바위를 때립니다. 선과 글자들은 끊임없이 부딪히고, 다시 덤빕니다. 화면 밖도 소란합니다. 화면 속 이미지가 영상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벽을 타고 오르고, 유리 벽면을 가로지릅니다. 바닥에는 무언가 철푸덕 부딪친 듯한 검은 형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관람객은 작품 앞에서 영상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단어와 선 사이를 걸어 다니게 됩니다. 애니메이션 속으로 들어온 듯한 공간입니다. 그런데 바위에 계속 달려드는 선들을 보고 있으면, 귀여우면서도 어쩐지 짠하고 뭉클한 건 왜일까요.
국립현대미술관이 31일부터 선보이는 ‘MMCA×LG OLED 시리즈 2026: 김 크리스틴 선-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은 영상과 벽화, 바닥 드로잉, 사운드가 서울박스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묶습니다.
‘MMCA×LG OLED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과 LG전자가 지난해 시작한 협력 프로젝트로, 해마다 작가 한 명을 선정해 서울박스를 위한 장소특정적 신작을 제작합니다. 올해는 55인치 OLED 디스플레이 72대를 연결해 가로 5.1m, 세로 8.4m의 곡면 화면을 만들었습니다.
참여 작가인 김 크리스틴 선(Christine Sun Kim)은 미국에서 태어나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입니다. 지난해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영국 미술 전문지 ‘아트리뷰’가 매년 집계하는 ‘파워 100’에서 34위에 선정됐습니다.
그를 흔히 ‘소리를 시각화하는 농인 작가’라고 소개하지만, 그의 작업은 농인 커뮤니티의 경험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미국 수어(ASL)와 악보, 만화적 기호 등을 결합해 언어와 소리가 권력과 제도, 교육과 미디어 속에서 생산되고 전달되는 방식을 드러냅니다. 이를 통해 “누가 발언할 수 있으며 누가 배제되는가”를 묻고, 언어와 번역, 차이와 이해, 접근성과 공존이라는 보편적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지난 30일 기자간담회는 여러 언어를 통과해 진행됐습니다. 작가의 미국 수어는 수어 통역사를 통해 영어로 옮겨진 뒤, 다시 한·영 통역사를 거쳐 한국어로 전달됐습니다. 질문은 반대 방향으로 건너갔습니다. 김 작가는 자신의 말이 여러 통역자를 거쳐 정확히 전달될 것이라는 ‘온전한 신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간담회 자체가 그의 작업이 다루는 소통과 번역의 구조를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작품의 영문 제목 ‘Have Many Dumb Fights Against Rock’은 문법적으로 매끄러운 문장도, 일상적인 관용구도 아닙니다. ‘바위와 수없이 많은 어리석은 싸움을 벌인다’거나 ‘바위를 상대로 많은 어리석은 싸움을 하다’ 등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한국어 제목인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은 이를 직역하기보다 작품의 위트와 열린 의미를 살려 옮긴 것입니다. 여기서 바위는 움직이지 않는 타인일 수도, 굳어진 제도와 규범, 편견과 사고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확신에 빠진 ‘나’일 수도 있습니다.
작가는 제목의 여섯 단어를 나타내는 미국 수어 동작을 고전 만화의 모션 라인과 결합했습니다. ‘많다’의 손동작은 여러 갈래로 퍼지는 선으로, ‘어리석다’의 동작은 머리를 때리는 듯한 기호로 바뀝니다. 두 팔이 부딪치는 ‘싸우다’와 손바닥을 치는 ‘맞서다’의 움직임도 화면 속 선이 됩니다. 작가는 벽과 바닥의 드로잉을 ‘악보’에, 화면 속 애니메이션을 이를 연주하는 ‘공연’에 비유했습니다. 수어를 모르는 관람객도 선이 향하는 방향과 충돌의 리듬을 몸으로 따라가게 됩니다.
흑백으로 이뤄진 화면에도 작가의 경험이 배어 있습니다. 김 작가는 “말로 하는 언어가 우위에 있는 세계에서 수어를 사용하며 사는 제 작품의 기반에는 공포가 있다”며 “저를 위해 설계된 세계가 아니기에 긴장과 소통의 오류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제한된 정보 속에서 오해 없이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욕구가 흑과 백으로 명료하게 구분되는 드로잉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김 작가가 바라보는 오늘날의 세계는 온갖 싸움으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권력과 소유권, 토지와 법규를 놓고 다투고, 정치적 논쟁과 온라인의 말싸움에서는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자신의 입장을 되풀이합니다. 그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주도권을 가지려고 끊임없이 싸우고 논쟁하지만, 마치 완고한 바위와 싸우는 듯 아무런 결론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작품이 갈등을 없애고 하나의 합의에 도달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김이 보여주는 소통은 충돌하고 오해하고 다시 번역하면서 관계를 조율해 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무모한 싸움’은 소모적인 대립인 동시에, 다른 언어와 감각을 지닌 존재들이 공존할 가능성이 생겨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영상이 반복되는 동안 완고한 바위는 그 자리에 있고, 선과 단어들은 부딪혀 튕겨 나갑니다. 하지만 주변으로 밀려났던 언어와 몸짓이 자기 주장을 하는 순간, 변화는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릅니다. 이 무모한 싸움이 뭉클하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셔츠 안 수영복’의 계절
지하철 U1 노선 알테도나우역에 내리자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깨에는 비치타월을 걸쳤고, 한 손에는 물안경을 들었다. 수영복 차림으로 전철에서 내리는 사람도 낯설지 않았다. 5분쯤 걸었을까. 잔잔한 알테 도나우(올드 도나우)가 눈앞에 펼쳐졌다.
독일에서 발원해 10개국을 거쳐 흑해로 향하는 도나우강은 빈에 이르러 여러 갈래로 나뉜다. 본류는 도심을 가로지르고, 홍수 방지를 위해 만든 인공 수로 ‘노이에 도나우(뉴 도나우)’가 나란히 흐른다. 두 물길 사이에는 길이 21㎞의 도나우섬이 펼쳐지고, 옛 도나우 본류의 일부는 정비를 거쳐 ‘알테 도나우’라는 호수 형태의 수역으로 남았다. 홍수를 막기 위해 조성된 공간은 오늘날 수영과 보트, 산책을 즐기는 시민들의 대표적인 휴식처가 됐다.
전기 보트를 타고 천천히 수면을 가르자 빈의 일상이 펼쳐졌다. 아이들은 강을 수영장처럼 누볐고, 패들보드를 탄 청년들은 물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백조가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도 이곳에서는 자연스러웠다. 강변 잔디밭에도 각자의 여름이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 낮잠을 청하는 사람, 와인을 나누는 친구들, 아이들과 물놀이를 하는 가족이 명화처럼 어우러졌다.
도나우섬의 강변 비치인 피어22는 조금 더 활기찬 여름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음악이 흐르고, 선베드에 누운 젊은이들은 햇살을 즐겼다. 물에서 올라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강으로 뛰어드는 풍경은 빈의 여름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줬다.
이런 풍경은 현지인만 누리는 일상이 아니다. 알테도나우와 도나우섬 곳곳에는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자연 수영장이 마련돼 있고, 덱(deck)과 잔디광장, 샤워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피어22와 코파비치처럼 지하철역에서 걸어서 닿을 수 있는 곳도 많다. 수영복과 수건만 챙기면 여행자도 시민들 틈에 섞여 강에서 보내는 한여름 오후를 경험할 수 있다.
황실 마구간, 힙한 광장으로
빈에서 가장 트렌디한 문화 공간을 꼽으라면 뮤지엄콰르티어(MQ)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실 마구간을 리모델링해 만든 이곳은 현재 50개가 넘는 박물관과 갤러리, 공연장, 디자인 숍, 카페가 모인 문화예술 복합단지로 운영 중이다.
첫 방문이라면 레오폴트 미술관과 현대미술관 무목부터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에곤 실레와 구스타프 클림트를 좋아한다면 레오폴트 미술관을, 현대미술에 관심 있다면 앤디 워홀과 오노 요코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무목이 좋은 선택이다.
그러나 모든 박물관을 다 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예술은 전시실 안에서 끝나지 않고, 광장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뿐 아니라 노트북을 들고나온 대학생, 약속을 기다리는 직장인, 공연을 즐기려는 여행객들이 하루 종일 광장을 채운다. 젊은 세대가 자연스럽게 모이는 도심 속 문화 놀이터에 가깝다.
MQ의 상징이 된 ‘엔치’는 매년 새로운 색으로 제작되는 야외 라운지 의자다. 누구나 자유롭게 앉아 책을 읽거나 커피를 마시고, 쉬어갈 수 있다. 올해는 개관 25주년을 맞아 오스트리아 전통 디저트에서 영감을 얻은 분홍색과 레모네이드를 닮은 노란색 엔치가 광장을 채웠다.
무료 프로그램도 빼놓을 수 없다. 5월 말부터 9월까지 메인 광장에서는 공연과 영화, 문학, 토크 콘서트로 구성된 ‘MQ 서머 스테이지’가 열린다. 또한 옥상 전망 공간 ‘MQ 리벨레’에서는 늦은 해를 머금은 슈테판 대성당과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로컬 여행을 원한다면 2구역으로
성 슈테판 대성당과 호프부르크 왕궁이 자리한 1구역이 제국의 영광을 기억하는 곳이라면, 도나우 운하 건너 2구역 레오폴트슈타트는 로컬의 빈을 가장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동네다. 세탁소와 빵집, 자전거 수리점이 골목을 채우고 카페 테라스에는 산책을 즐기는 주민들이 자리한다. 운하 하나를 건넜을 뿐인데 도시의 속도도 한결 느긋해진다.
동네의 중심에는 카르멜리트 시장이 있다. 화려하거나 규모가 큰 시장은 아니지만 대신 여행자가 빈의 일상을 가장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아침이면 채소와 과일을 고르는 주민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해지고, 빵 굽는 냄새와 갓 내린 커피 향이 골목을 채운다. 주말이면 직거래 장터가 열려 시장은 더욱 활기를 띤다.
이 시장의 풍경은 이 동네를 지켜온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 한때 이곳은 빈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지였다. 17세기부터 유대인들이 모여 살며 상점과 시장을 일궜고,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은 뒤에도 그 흔적은 거리 곳곳에 남아 있다. 지금도 코셔 베이커리와 식료품점, 학교와 회당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검은 모자와 긴 코트를 입은 정통파 유대인들을 마주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최근에는 역사 위에 젊은 감각이 더해지고 있다. 오래된 건물 1층에는 독립 서점과 디자인 숍, 개성 있는 카페와 베이커리가 하나둘 문을 열었다. 여유가 있다면 골목을 천천히 걸어보자. 특별한 목적지가 없어도 발걸음이 자꾸 느려지는 동네다. 빈 사람들이 왜 이곳을 사랑하는지 금세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도시 안에서 만난 포도밭, 부셴샹크
많은 사람이 빈을 음악과 커피의 도시로 기억하지만, 이곳은 수도 안에서 상업용 와인이 생산되는 몇 안 되는 도시 가운데 하나다. 약 600㏊의 포도밭이 시내를 둘러싸고, 수십 개 와이너리가 지금도 와인을 빚는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에게 포도밭을 찾아 와인 한잔을 마시는 일은 특별한 여행이 아니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일상이다.
‘부셴샹크’는 빈의 와인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와이너리가 직접 운영하는 전통 와인 선술집으로, 그해 수확한 와인과 간단한 지역 음식을 함께 낸다. 18세기 요제프 2세가 와인 생산자의 직판을 허용하면서 시작된 문화로, 지금도 치즈와 햄, 스프레드, 빵 같은 소박한 안주와 함께 와인 자체의 맛을 즐기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여행자도 어렵지 않게 이 풍경에 동참할 수 있다. 트램 D를 타고 종점 누스도르프에서 내려 ‘시티 하이킹 트레일 1’을 따라 2㎞ 남짓 걸으면 포도밭이 이어진다. 완만한 언덕길을 따라 걷는 동안 도시 전경과 도나우강이 시원하게 펼쳐져 발걸음이 가볍다.
길 끝에서 만난 ‘비닝어 암 누스베르크’는 빈을 대표하는 부셴샹크 가운데 하나다. 이곳의 별미는 빈을 대표하는 와인 게미슈터사츠다. 여러 품종의 포도를 한 포도밭에서 함께 재배해 같은 날 수확하고 함께 양조하는 빈만의 와인이다. 흉작을 줄이기 위한 농부들의 지혜에서 시작됐지만, 오늘날에는 빈 와인을 상징하는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와인잔을 오래 들고 있어도 누구 하나 시간을 재촉하지 않는다. 잔이 비면 일행이 말없이 와인을 따라주고, 아이들은 포도밭 사이를 뛰어다니며, 반려견은 테이블 아래 느긋하게 몸을 뉜다. 궁전과 미술관을 둘러보던 하루는 그렇게 포도밭 너머로 천천히 저물어간다.
클래식, 공연장 밖으로 나오다
여름의 빈은 해가 좀처럼 지지 않는다. 밤 9시를 훌쩍 넘겨도 하늘에는 푸른빛이 남아 있다. 이 계절의 저녁을 가장 아름답게 펼쳐내는 곳은 프라터다. 1766년 황실 사냥터가 시민에게 개방되면서 탄생한 이곳은 250년 넘게 주민들의 쉼터였다. 드넓은 잔디와 숲길, 놀이공원이 어우러져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로 늦은 저녁까지 활기가 이어진다.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매년 여는 ‘프라터 피크닉 콘서트’는 이런 공원의 성격을 그대로 닮았다. 수만 명이 찾는 무료 공연이지만 ‘관객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긴장감은 없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도 되고, 아이와 함께 와도 되고, 강아지를 데려와도 된다. 올해는 한국계 미국인 지휘자 최현이 지휘를 맡았다.
첫 음이 울리자 공원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뛰놀던 아이들은 부모 곁으로 돌아왔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시선은 자연스럽게 무대를 향했다. 누군가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연주를 들었고, 누군가는 잔디에 누운 채 귀를 기울였다. 음악에 맞춰 두 손을 맞잡고 천천히 춤을 추는 사람들도 보였다. 풀 향기를 머금은 바람, 늦은 저녁의 공기, 아이들의 숨소리까지 음악의 일부가 되는 순간이었다.
공연이 끝나도 사람들은 서둘러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바로 옆 놀이공원에 하나둘 불이 들어왔고, 1897년 세워진 비너 리젠라트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클래식이 흐르던 공원은 어느새 웃음과 설렘으로 가득 찬 여름밤으로 이어졌다.
여행은 도시를 얼마나 많이 보는지가 아니라, 그 도시가 살아가는 속도를 함께 걸어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빈의 여름은 이를 가장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시간이다.
자신의 유튜브 채널 영상에서 “재선거”를 외치는 악성 민원인을 풍자했다가 논란에 휩싸였던 코미디언 이수지가 1일 사과의 글을 올렸다.
이수지는 유튜브 채널 ‘핫이슈지’에 자필 글을 올리고 “불편함과 실망을 느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고개숙여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수지는 “마음 상하셨을 분들께 빠르게 대처하고 사과드리지 못한 점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제 불찰이며 책임”이라며 “웃음을 만들겠다는 의도와 별개로, 결과적으로 누군가에게 상처와 불편함을 드렸다는 점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늦었지만 제 진심을 직접 전하고 싶어 이 글을 남긴다”며 “웃음을 드려야하는 희극인으로서 저는 더 신중했어야 했다. 제 연기와 콘텐츠가 누군가에게는 상처나 불쾌감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했다”고 했다.
이수지는 “이번 일을 계기로 저 자신을 더욱 깊이 돌아보겠다”며 “많은 분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건강한 웃음을 전하는 희극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이수지는 지난달 14일 공개한 영상 <진짜 극한직업> 공무원 편에서 악성 민원인을 상대하는 공무원을 연기했다. 영상 속 악성 민원인 중에는 “재선거”를 연달아 외쳤고, 이수지는 “여기서 이러시면 안된다”고 반응했다. 그러나 재선거 요구가 악성 민원인과 동일 선상에 놓였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핫이슈지 제작진은 지난달 15일 사과 입장을 밝혔고, 영상을 삭제했다. 이수지가 유튜브 채널에 직접 사과문을 올린 것은 18일 만이다.
‘주말의 취향’은 지면에 다 담기 어려운 문화 현장의 소식들을 풀어서 전합니다. 마음은 가볍게, 생각은 깊이 할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서울박스’ 한가운데 검은 파도가 솟아 있습니다. 높이 8m가 넘는 화면이 한껏 치솟았다가 끝부분이 관람객 쪽으로 쏟아져 내리듯 휘어집니다. 매끈한 검은 화면 위로 우주에 떠 있는 듯한 바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주위로 낙서처럼 보이는 선과 글자들이 몰려듭니다.
HAVE, MANY, DUMB, FIGHTS, AGAINST, ROCK.
여섯 단어와 고전 만화에서 본 듯한 ‘모션 라인’이 달려들어 바위를 때립니다. 선과 글자들은 끊임없이 부딪히고, 다시 덤빕니다. 화면 밖도 소란합니다. 화면 속 이미지가 영상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벽을 타고 오르고, 유리 벽면을 가로지릅니다. 바닥에는 무언가 철푸덕 부딪친 듯한 검은 형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관람객은 작품 앞에서 영상을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단어와 선 사이를 걸어 다니게 됩니다. 애니메이션 속으로 들어온 듯한 공간입니다. 그런데 바위에 계속 달려드는 선들을 보고 있으면, 귀여우면서도 어쩐지 짠하고 뭉클한 건 왜일까요.
국립현대미술관이 31일부터 선보이는 ‘MMCA×LG OLED 시리즈 2026: 김 크리스틴 선-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은 영상과 벽화, 바닥 드로잉, 사운드가 서울박스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묶습니다.
‘MMCA×LG OLED 시리즈’는 국립현대미술관과 LG전자가 지난해 시작한 협력 프로젝트로, 해마다 작가 한 명을 선정해 서울박스를 위한 장소특정적 신작을 제작합니다. 올해는 55인치 OLED 디스플레이 72대를 연결해 가로 5.1m, 세로 8.4m의 곡면 화면을 만들었습니다.
참여 작가인 김 크리스틴 선(Christine Sun Kim)은 미국에서 태어나 독일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입니다. 지난해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영국 미술 전문지 ‘아트리뷰’가 매년 집계하는 ‘파워 100’에서 34위에 선정됐습니다.
그를 흔히 ‘소리를 시각화하는 농인 작가’라고 소개하지만, 그의 작업은 농인 커뮤니티의 경험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미국 수어(ASL)와 악보, 만화적 기호 등을 결합해 언어와 소리가 권력과 제도, 교육과 미디어 속에서 생산되고 전달되는 방식을 드러냅니다. 이를 통해 “누가 발언할 수 있으며 누가 배제되는가”를 묻고, 언어와 번역, 차이와 이해, 접근성과 공존이라는 보편적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지난 30일 기자간담회는 여러 언어를 통과해 진행됐습니다. 작가의 미국 수어는 수어 통역사를 통해 영어로 옮겨진 뒤, 다시 한·영 통역사를 거쳐 한국어로 전달됐습니다. 질문은 반대 방향으로 건너갔습니다. 김 작가는 자신의 말이 여러 통역자를 거쳐 정확히 전달될 것이라는 ‘온전한 신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간담회 자체가 그의 작업이 다루는 소통과 번역의 구조를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작품의 영문 제목 ‘Have Many Dumb Fights Against Rock’은 문법적으로 매끄러운 문장도, 일상적인 관용구도 아닙니다. ‘바위와 수없이 많은 어리석은 싸움을 벌인다’거나 ‘바위를 상대로 많은 어리석은 싸움을 하다’ 등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한국어 제목인 ‘완고한 바위, 무모한 싸움들’은 이를 직역하기보다 작품의 위트와 열린 의미를 살려 옮긴 것입니다. 여기서 바위는 움직이지 않는 타인일 수도, 굳어진 제도와 규범, 편견과 사고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확신에 빠진 ‘나’일 수도 있습니다.
작가는 제목의 여섯 단어를 나타내는 미국 수어 동작을 고전 만화의 모션 라인과 결합했습니다. ‘많다’의 손동작은 여러 갈래로 퍼지는 선으로, ‘어리석다’의 동작은 머리를 때리는 듯한 기호로 바뀝니다. 두 팔이 부딪치는 ‘싸우다’와 손바닥을 치는 ‘맞서다’의 움직임도 화면 속 선이 됩니다. 작가는 벽과 바닥의 드로잉을 ‘악보’에, 화면 속 애니메이션을 이를 연주하는 ‘공연’에 비유했습니다. 수어를 모르는 관람객도 선이 향하는 방향과 충돌의 리듬을 몸으로 따라가게 됩니다.
흑백으로 이뤄진 화면에도 작가의 경험이 배어 있습니다. 김 작가는 “말로 하는 언어가 우위에 있는 세계에서 수어를 사용하며 사는 제 작품의 기반에는 공포가 있다”며 “저를 위해 설계된 세계가 아니기에 긴장과 소통의 오류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제한된 정보 속에서 오해 없이 메시지를 전하려 했던 욕구가 흑과 백으로 명료하게 구분되는 드로잉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김 작가가 바라보는 오늘날의 세계는 온갖 싸움으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권력과 소유권, 토지와 법규를 놓고 다투고, 정치적 논쟁과 온라인의 말싸움에서는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자신의 입장을 되풀이합니다. 그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주도권을 가지려고 끊임없이 싸우고 논쟁하지만, 마치 완고한 바위와 싸우는 듯 아무런 결론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작품이 갈등을 없애고 하나의 합의에 도달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김이 보여주는 소통은 충돌하고 오해하고 다시 번역하면서 관계를 조율해 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무모한 싸움’은 소모적인 대립인 동시에, 다른 언어와 감각을 지닌 존재들이 공존할 가능성이 생겨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영상이 반복되는 동안 완고한 바위는 그 자리에 있고, 선과 단어들은 부딪혀 튕겨 나갑니다. 하지만 주변으로 밀려났던 언어와 몸짓이 자기 주장을 하는 순간, 변화는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릅니다. 이 무모한 싸움이 뭉클하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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